[우정이야기]현행 우편번호 폐지? 아직은 아니에요
2013.10.30 22:27
[우정이야기]현행 우편번호 폐지? 아직은 아니에요
미드(미국 드라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90210’이라는 숫자를 알 것이다. 미국 부촌의 상징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베벌리힐스의 우편번호다.
이 숫자는 폭스TV를 통해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간 총 10개 시즌이 방영된 <베벌리힐스의 아이들(Beverly Hills·90210)>로 인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미국 상류층 고등학생들의 자유분방하고 화려한 생활을 그린 이 드라마가 많은 인기를 누리면서 화제를 뿌렸기 때문이다. CW방송에서 지난 5월 시즌 5까지 방영된 리메이크작은 아예 제목이 <90210>이었다.
90210에서 보듯이 미국 우편번호는 다섯 자리 체계로 되어 있다. 첫 자리는 0~9까지 10개 주 그룹을 표시한 것이다. 두세 번째 자리는 주 그룹 내의 지역그룹, 나머지 두 자리는 지역 안의 수취인 주소 그룹이다. 1963년에 이 다섯 자리 번호체계로 시작했다가 1983년부터 네 자리 숫자를 추가할 수 있도록 했다.
즉 일반 고객은 다섯 자리의 우편번호(5-digit ZIP Code)를, 기업 고객은 배달 지역에서 다시 집배구 영역별로 세분화한 아홉 자리 우편번호(ZIP+4 Code)를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앞의 다섯 자리 우편번호와 뒤의 네 자리는 하이픈으로 구분한다. 미국에서 우편번호는 집세 납부에서 학교에 낼 서류까지 안 쓰이는 곳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숫자다. <90210>이라는 제목은 바로 그런 문화를 반영한다.
앞으로는 우리 우편번호도 그렇게 될 것 같다. 미국처럼 다섯 자리로 바뀌고 체계도 비슷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현행 우편번호가 없어지고 다섯 자리의 기초구역번호로 대체된다고 해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기초구역제도 시행에 따른 것이다.
국가기초구역제도란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업무에 활용할 수 있는 기초구역을 동일한 기준으로 동일하게 설정해서 전 기관이 함께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전 국토를 최소 단위로 나눈 기준구역은 기초구역번호라는 하나의 번호로 표시된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법정동, 행정동, 지번 등 각기 다른 기준에 따라 나눴던 경찰서, 소방서, 우체국 등의 담당 구역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기초구역번호로 대체되는 새 우편번호는 현행 우편번호와는 완전히 다르다. 안전행정부는 지형지물, 인구, 사업장 수 등을 고려해 격자 형태로 기초구역을 나누고, 첫 세 자리는 시·군·구를, 뒤의 두 자리는 읍·면·동을 나타내는 조합으로 새 번호를 부여했다. 이를테면 강남구의 기초구역번호는 06000~06371이라는 것이다.
국가기초구역제도가 시행되는 시기는 내년 1월이다. 코 앞으로 다가온 셈이다. 하지만 당장 현행 우편번호가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9월 일부 언론이 “배달지 주소 식별을 위해 사용되는 현행 우편번호가 45년 만인 2015년 7월 폐지된다”고 보도한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현행 우편번호 폐지 및 새 우편번호 시행 시기는 아직 정해진 바 없다”며 보도 내용에 대해 정정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새 우편번호 시행을 위해서는 만만찮은 준비가 필요하다. 전국 집배원별 배달구역 조정, 정보화 시스템 및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자동화 설비의 성능 개선, 대국민 홍보 및 안정적 운영을 위한 시범 운영 등 까다로운 작업이 많다. 이런 준비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고, 따라서 새 우편번호 시행은 2015년 7월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게 우정사업본부의 얘기다.
새 우편번호 내용 및 시행 시기는 그런 준비 상황을 감안해 우편법 시행령 제5조 2항에 따라 별도로 고시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미드 <90210>처럼 대한민국에서 이를테면 <06000> 같은 숫자 제목의 드라마가 등장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해야 하나.
<신동호 경향신문 논설위원 hudy@kyunghyang.com>
2013 11/05ㅣ주간경향 10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