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위한 삶이 자랑스러운 일흔 청춘
2008.02.11 23:58
남을 위한 삶이 자랑스러운 일흔 청춘
[머니위크]은퇴, 그 후의 삶..세방전지 남충익 전 대표
타닥타닥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방 한켠에는 서툰 글씨에 아기자기한 그림이 가득찬 카드들이 쌓여 있고 컴퓨터 옆에는 두꺼운 영어 사전이 놓여 있다. 서너 명의 젊은이가 컴퓨터 앞에서 일에 열중하고 있는 이곳은 기아로 고통받는 해외의 어린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연결해 주는 한국기아대책기구. 그중에서도 해외 어린이들의 편지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국내에서 외국으로 보내는 편지를 영어로 번역하는 다리 역할을 맡고 있는 국제팀의 사무실이다.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해야만 가능한 일이라 자원봉사자들 역시 대학생 또래가 대부분. 남충일(75)씨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희끗희끗한 흰머리를 지니고있는 자원봉사팀의 왕고참 할아버지다.
◆자원봉사하는 할아버지
남씨는 수요일마다 영어 사전을 들고 이곳을 찾는다. 일주일에 한번이라곤 하지만 매주 빠짐없이 그것도 오전 10시30분부터 저녁 7시30분까지 하루종일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루 동안 남씨가 번역하는 편지 양만해도 20~30장. 그나마 편지는 생활 용어라 손쉬운 편이다. 국제기구 간에 오고가는 공문서를 번역해야 할 경우에는 꽤 오랜 시간을 공들여가며 단어 하나하나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젊은이들도 하기 어려운 그 일을 그는 2004년부터 벌써 5년째 하고 있다.
"처음 봉사활동을 신청했을 때만해도 70먹은 노인네가 일거리를 달라니까 이곳 책임자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대요. 그런데 이제는 기아대책기구에서 영문 번역이 필요하면 절 먼저 찾아요. 저 같은 늙은이에게 일할 기회를 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도움이 된다면 저 또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을 하고 싶은거죠."
지난해에는 5년 동안의 성실한 봉사활동 끝에 자랑스런 훈장도 얻었다. 그의 가슴에서 반짝이는 은배지. 봉사활동 1500시간을 채운 뒤에야 받을 수 있는 소중한 배지라고 한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봉사활동 2000시간을 채워 금배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남씨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다.
"봉사활동 1500시간 이라는 것이 말로 하긴 쉽지만 실제로 실천하긴 어려운 일입니다. 5년 동안 한번도 빠짐없이 꾸준히 봉사활동을 했더니 이런 것도 받고 자랑스럽죠. 남들은 이 배지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도 저는 이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조금있으면 금배지를 받게 되는데 그러면 어깨가 더 무거울 것 같아요. "
남씨는 "요즘에는 친구들도 부쩍 나를 부러워한다"며 말을 이어간다. "생각할수록 제가 정말 복을 받았다 싶은 게 바로 '영어'에요. 그래도 제가 대학시절부터 미군부대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무역회사에 재직한 경험도 있고 하다보니 꽤 영어를 잘하는 축에 속하거든요.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데가 없다'는 하소연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저는 직장 생활을 할 때부터 늘 하던 영어를 이용해 지금까지 이렇게 젊은사람들과 어울려 사회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친구들도 저에게 늘 부럽다는 얘기를 달고 살지요."
◆은퇴 후, '여유'를 되찾다
"젊어서 한창 일할 때는 일거리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운 일인지 잘 몰랐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남씨는 1958년 한일은행에 입사 75년 금융인 스카우트 열풍으로 개인 회사로 자리를 옮긴 뒤 81년 세방전지 대표이사를 끝으로 은퇴를 했다.
남씨는 대표이사라는 무거운 직책을 떠맡고 있었으니 업무에 대한 부담감 역시 큰 것이 사실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만큼 더 치열하게 더 큰 책임감을 갖고 일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렇게 20년이 넘는 기간을 숨가쁘게 일에만 매달려 와서인지 그는 은퇴 직후 '사회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은퇴 후 "더 바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단지 정년퇴임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할일 없는 노인네'로 대접받는 것은 싫었다는 것. 남씨는 은퇴 후 무역 회사를 새롭게 시작했다. 하지만 1년 만에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그때 비로소 '제 인생'을 돌아보게 된 것 같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저는 제가 회사에서 맡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또 제 가족을 위해 앞만보고 내달렸어요. 주변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죠. 그런데 막상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나니 주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때 생각한 것이 '인생 늘그막에 더 이상 돈욕심 부리지 말고 이제 남을 위해 살자'였어요. 제가 지금 봉사활동을 하는 이유 역시 그때 얻은 깨달음 덕분이죠."
일본의 한 무역회사에서 1년 동안 무급으로 해외무역업무를 돌보는 자원봉사를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회사는 일본 소속이었지만 한국의 물건을 해외로 수출하는 업무였기 때문에 한국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남씨는 "똑같이 바쁜 하루를 보내는데도 왜그런지 예전보다 훨씬 여유가 생겼다"며 "변한 것은 내 생활이 아니라 마음이었다"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은퇴 후 누구나 한번쯤은 겪기 마련이라는 '신경쇠약증'이나 '우울증'을 저는 한번도 앓지 않았어요. 물론 그런 걸 앓을 새도 없이 바쁘게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시야가 한층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단지 개인적인 수익에 목적을 두지 않더라도 일 하는 자체가 즐거워지기 시작한거죠. 이 나이에도 건강한 몸으로 젊은이들 못지않게 바쁘게 살 수 있다는 것, 참 멋지고 고마운 일 아닙니까."
◆바쁘게 살면 인생이 즐거워진다
산업활동에서 손을 뗀 요즘에도 남씨의 일주일 스케줄은 빡빡하기 그지없다. 월요일에는 수필 수업을 듣고 화요일에는 대학 동창들과 정기적으로 만남을 갖는다. 수요일에는 기아대책기구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목요일에는 중국어 수업을 듣는다. 금요일에는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한일은행의 동기들과 모임을 갖고 토요일에는 지인들 몇몇과 어울려 바둑 모임을 갖는다. 틈틈히 수필을 쓰고 외국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해 지인들에게 선물 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아무리 젊게 생각하려고 해도 신체적으로 나이가 드는 건 막을 수 없는 것 같아요.선습후망(先習後忘)이라고 해야 할까요. 틈틈히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새로운 언어도 배우려고 하지만 막상 공부를 해도 또 바로 잊어버려요. 중국어만해도 벌써 6년째 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아직 간단한 회화도 어려워하는 처지에요."
그런 남씨에게 "공부해도 금방 잊어버릴 것을 왜 그렇게 열심히 배우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남씨의 대답은 단호하다. 나이가 들어 배우는 데 예전보다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을 지레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아니 굳이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배우는 즐거움' 자체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남씨의 생각이다.
"능숙하진 못해도 중국어로 짧게나마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저한테는 너무나 큰 즐거움이에요. 이 즐거움을 나이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매주 한번씩 시간을 내서 학원 수업을 듣는 것이 대단히 번거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에게는 젊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고 또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니까요. 나이 들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해도 사람의 '노력'만큼은 꺾을 수 없는 것 같아요. 배우고 또 잊어버리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지금 이 순간 제가 '노력'하고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씨는 "행복한 노년 생활의 비결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고 다시 한번 힘주어 강조한다. 그저 열심히 성실하게 현재를 잘 살아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의 인생을 행복하게 가꾸어주는 비결이자 앞으로의 노년기를 튼튼히 지켜 줄 자산이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제가 81년에 은퇴를 했으니, 벌써 은퇴한 지 15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앞으로 제가 살아가야 할 날은 아마 지나온 15년 세월보다 길면 길었지 짧지는 않을 것입니다. 길고긴 노년 생활을 잘 보내기 위해서 미리미리 준비를 하는 게 가장 현명하겠죠. 하지만 막상 10년 뒤의 일을 미리미리 준비한다는 건 보통 사람들에겐 어려운 일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젊었을 때 성실하게 살았던 게 지금 다 제 사회활동의 밑거름이 돼서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아요. 현재의 삶에 충실하다보면 미래는 저절로 착실하게 준비 되기 마련입니다."
스스로를 '바쁜 할아버지'라고 말하는 남충일 씨. 봉사활동에 학원수강까지 바쁜 일주일을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나이를 잊은 '삶의 열정'이 느껴진다.
-출처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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