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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11.04.05 21:56

둥굴이 조회 수:1389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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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단편 소설
저자 김동리
출판일 1955/1958

줄거리

부도암은 봄이 되면 진달래꽃으로 묻히었다. 그것이 멀리서보면, 발그레한 아지랑이 속에 조는 듯했다. 큰절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 깎아지른 벼랑을 돌아가면 있는 구석자리에, 이 오래된 암자는 세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듯이 나직이 앉아있었다. 암자를 지키는 중이라고는 나이 예순을 넘은 노승과 그의 외손주뻘이 된다는, 올해 겨우 아홉 살 먹은 어린 상좌가 있을 뿐이었다.

노승은 본디큰절이 중이었으나 워낙 괴도 욕심도 없는 무능한 위인이었으므로, 이 암자와 암자를 지키는 노승은, 큰절 중들의 관심밖에 따로 놓인 존재들이었다.

다만 봄마다 진달래꽃이 엄청나게 많이 핀다는 것만이 가관이라면 가관이었으나 아무도 찾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암자 뒤에 사람모양을 하고 거멓게 서있는 두 개의 부도바위 끝에 이따금 외로운 독수리가 날아와 앉아 골짜기와 산등성이를 멍하니 바라보곤 할 뿐이었다.

노승의 외손주 뻘 된다는 목이 가늘고 얼굴이 가무잡잡한 어린 소년은 이름이 성혜이었다. 봄을 몹시 타는 이 소년은 진달래가 필 무렵이면 거의 끼니를 잊다시피 하고 산으로만 돌아다녔다.

처음엔 그래도 아침저녁 예불 종을 칠 것만은 지키던 것이, 이즈음 와서는 그것마저 거르기가 일쑤였다. 노승이 어린 성혜를 붙잡고 날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도 소년은 언제나 대답이 없었다.

입술이 새카맣고 똥에 꽃이 섞여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진달래를 따먹고 다닌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여러 날 동안 꽃만 따먹기 위해서 돌아다닌다는 것은 수상쩍은 일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말없이 새까만 두 눈으로 할아버지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노승은 소년에게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의 희미한 기억 속엔 어느덧 옛날의 딸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르고 있었다. 겨우 여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성혜를 앞세우고, 그녀가 이 암자를 찾은 것은 이른봄이었다.

그때 딸은 아버지인 노승에게 그들 모자가 이 암자를 찾은 사연을 말하지 않은 채 다만 울기만 했다. 그렇게 사흘동안 울고서, 딸은 성혜를 노승에게 맡기고 떠나간 채 이날까지 소식이 없었다.

노승이 아직 열일곱 살밖에 나지 않았던 소년시절, 저보다 두 살 손위인 이복누이로 하여금 무서운 운명의 씨를 가지게 했던 일은 지금도 잊혀진 것이 아니었다. 그 길로 그는 머리를 깎고 절간으로 들어와 중이 되었고, 누이는 이웃마을 술집의 소실이 되었었다.

그와 동시에 핏덩이(계집애)는 남을 주어 기른다고만 어렴풋이 들어왔던 것이, 그대로 자라서 시집을 가고, 성혜를 낳고, 끝내는 도로 이 아비란 것을 찾아와 운명의 씨(성혜)를 돌려주곤 돌아갔던 것이다. 떠날 때 딸은 시뻘건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자기도 절간으로 가겠다는 한마디를 남겼으나,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도 귀에 쟁쟁한 것은, 그때 그 눈이 시뻘건 젊은 여자로부터 평생에 꼭 한번들은 <아배>란 그 한마디였다.

딸이 떠난 지 삼년 동안에 소년은 <천자문>을 떼고 지금은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는 중이다. 글재주가 특별히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필재만은 놀라운 편이어서, 큰절에서는 성혜라는 이름보다 신동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편이었다.

소년은 바위아래서 가만히 혼자 무엇을 생각하고 있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노승은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저 애가 또 제 어미를 생각하는구나싶어, 한숨짓곤 하였다. 산을 덮은 듯한 진달래도 이제 한 고비를 넘으려 했다. 소년은 종일 통 일을 돌보지 않고 매일 진달래 속에서만 묻혀 살았다. 그전 같으면 아무리 게으름을 피우다가도 글씨를 쓰라고 하면 그것만은 싫어하지 않고, 이내 종이와 필연을 내어오던 것이, 이제는 그것마저 시들해졌는지 대답이 없었다.

소년이 내려놓은 꽃묶음 속에는 진달래 외에 무서운 독버섯도 함께 있었다. 그것을 본 노승은 노여워하며 그 버섯을 먹으면 안 된다고 두어 번이나 일러주었다. 그러나 소년의 입에서는 알아들었다는 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니 노승은 알아들었을 거라 짐작하며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이 날도 소년은 아침에 나간 채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서 저녁예불을 마친 노승은 소년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찾아 나서고 말았다.

노승은 마루 끝에서 뜰 끝까지 나가보았다. 뜰 끝에서 다시 골짜기 쪽으로 내려가 보았다. 골짜기를 돌아 또 다음 골짜기까지 들어가 보았다. 응달진 골짜기라, 진달래도 여기서는 지금이 한참이었다.

노승은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그 쪽에 있는 검은 바위 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진달래꽃을 가슴에 가득 안은 채 소년이 그 곁에 누워있기 때문이었다. 노승은 처음, 소년이 거기서 잠들었거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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