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세상을 바꾼 작은 실천
2009.12.25 22:06
2009 세상을 바꾼 작은 실천
비통한 일도 많았지만 그로 인해 성숙할 수 있었던 2009년이었다. 시민들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일상에서의 작은 실천을 통해 스스로를, 그리고 주변을 바꿔나갔다.
거창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날 선 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때’ ‘내가 가진 작은 것이라도 나누려 노력할 때’ 세상이 조금씩 살 만해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2009년 일상에서의 작은 실천으로 희망을 일궈온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팔방미인들의 삼국카페
여대생 김보미씨(닉네임 ‘봄날의 달님’)는 ‘등업’ 승인받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인터넷 카페 세 곳에서 동시에 활동 중이다. 이른바 ‘삼국카페’(소울드레서·쌍코·화장발)의 회원이다. 20~30대 여성들이 모여 성형과 패션, 화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이 커뮤니티 카페의 회원들은 지난해 촛불집회부터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각종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올해 7월, ‘훈내나는 바자회’를 열어 그 기금으로 일간지에 노무현 전대통령을 추모하는 광고를 냈고, 9월에는 ‘탐탐한 바자회’를 통해 언론법 개정에 반대하는 텔레비전 광고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심의에 걸려 방영에는 실패했다). 12월6일에는 현 정부의 복지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뜻에서 다른 단체들과 함께 ‘어려운 이웃을 위한 김장담그기’ 행사에 참여했다.
김보미씨처럼 삼국카페 회원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은 보통 여성이다. 카페 안에서 주로 패션·미용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되 연애·학업·가족 문제 등 살아가는 이야기도 폭넓게 나눈다. 정치도 그중 하나다. 12월16일 노 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 출판 기념회에서 카페 회원들과 함께 자원봉사 활동을 벌인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특별한 의식이 있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사회가 어수선한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양심에 걸리는 일이다.”
■강원도 누비는 ‘바른 언론 전도사’
2009년 1월1일, 해돋이 인파로 붐비는 강원도 양양군 낙산해수욕장에 패널을 든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른바 ‘조·중·동’의 왜곡 보도 사례를 고발하는 패널 앞에서 이들은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배포했다. 지역 촛불모임을 함께한 인연으로 이 <해맞이 판넬전>에 참여하게 됐다는 황동규씨(41, 닉네임 ‘백두대간’)는 이날 이후 ‘바른 언론 전도사’로 나섰다. 잘못된 언론을 욕하기보다 이에 맞설 만한 언론을 키워주는 것, 상대를 비판하기보다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진짜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른 언론 지킴이’ 황동규씨.
황씨는 이름하여 ‘촛불로 각성한 시민’ 중 하나다. 그 전까지는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던 남동생과 말다툼을 벌이다 콧대를 부러뜨린 일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난해 촛불 정국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에 오른 수많은 글을 새벽까지 읽으며 그는 매우 갈등했다고 한다. ‘이게 정말일까?’에서 출발한 의문은 결국 ‘그간 내가 너무 어리석게 살았구나’로 귀결됐다.
지난여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그는 고민 끝에 봉하마을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멋모르고 조·중·동 장단에 맞춰 노 대통령을 가혹하게 씹어댔던’ 과거가 스스로 용서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어리석게 산 죄를 충분히 반성한 다음’ 봉하마을을 찾겠다고 말한다. 지난 11월부터 매주 고성군을 찾는 것도 이런 반성의 일환이다. 지금 사는 속초에서 매주 ‘바른 언론 배포’ 캠페인을 벌여온 것으로 성이 안 차 상황이 훨씬 열악한 고성까지 진출한 것이다. 덕분에 한 달 만에 고성에서 경향신문 정기 구독자를 50명 이상 확보하는 성과도 거뒀다.
황씨가 속한 ‘진실을 알리는 시민(진알시)’에는 이처럼 적극적으로 언론 운동을 벌이는 회원이 전국 80여 개 지역에 흩어져 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12월18일 제11회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진알시에 수여했다.
■은평구 아줌마 3인방의 파워
결국 아줌마들만 남았다. 촛불을 함께 들었던 남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난해 광우병 파동 때 만들어진 인터넷 카페 ‘은평촛불(cafe.daum.net/epgu)’에서 만난 백미숙(47)·김영희(41)·김현옥(36)씨도 중간에 고비를 겪었다. 애초부터 운동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주부이자 직장여성이었다. 내 가족만 잘 건사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촛불로 새로운 진실에 눈뜬 이상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내 자식을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해야 했다. 그렇다고 계속 촛불만 들 수는 없었다.
이들이 첫 돌파구를 찾은 것은, 진알시와 함께 한 ‘바른 언론 알리기’ 캠페인이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가족도 뿌리친 채 지하철 연신내역 인근에서 캠페인을 벌였다. 미디어법 파동 같은 돌발 상황이 터지면 평일 아침에 나가 <미디어오늘> 특별판 등을 배포했다. 이런 날은 새벽 5시 기상이 보통이었다. “남자들이야 제 한 몸 건사하면 그만이지만 아줌마들은 아침밥까지 지어놓고 나와야 한다”라고 김영희씨는 푸념했다.
그러다 점차 지역·교육 문제에까지 관심을 갖게 됐다. 같은 동네에서 사는 데다 자녀 또래까지 비슷해 관심사가 통했다. 얼마 전에는 지역의 ㄷ고교를 겨냥해 ‘자율형 사립고 전환 반대’ 서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재단 전입금 규모도 한심한 수준이면서 학부모 주머니 털어 자사고를 하겠다는 발상이 너무 괘씸했기 때문이다. 구정 또한 관심을 갖고 보니 한심했다. 구의 예산 낭비 행태 하며 의회에서 막말을 서슴지 않는 구청장을 보니 기가 막혔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이들은 쓸 만한 지역언론을 키우는 것이 정말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최근 이들이 주목한 것은 은평구민이 출자한 인터넷 신문 <은평시민신문>이다. <은평시민신문>은 내년부터 종이 신문으로도 간행될 예정인데, 이렇게 되면 매주 토요일 ‘바른 언론 알리기’ 캠페인 때 이 신문 배포도 병행할 계획이다.
지난 1년 반 함께하는 실천을 통해 이들이 얻은 것은 ‘평생 이웃’이다. “언제라도 은평구를 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니들과 정이 들면서 맘이 바뀌었다”라고 김현옥씨는 말했다. 백미숙씨는 이렇게 말했다. “동창이건 직장 동료건 늘 바깥에서만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처음으로 동네 네트워크가 생겼다.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비로소 깨달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들의 마을 만들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아줌마 3인방. 왼쪽부터 김영희·백미숙·김현옥씨.
■“우리는 기부도 서태지 팬답게 한다”
가수 서태지 마니아 사이에는 ‘깔대기 이론’이라는 게 있다.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든 결론은 서태지에게 돌아온다는 이론이다. 정혜진씨(31)에 따르면, 서태지 이름으로 ‘기부 서클(Giving Circle)’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도 여기서 출발했다. 지난해 서태지가 8집으로 컴백하며 벌인 대규모 이벤트가 ‘미스터리 서클’이었기에 ‘서클’이라는 단어에 일단 ‘꽂힌’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서태지 마니아 기빙서클’은 지난 11월20일 ‘함께일하는재단’과 함께 저소득층 청소년 지원을 위한 기부 협약을 체결했다.
최근 들어 연예인 팬클럽 중에는 기부나 선행을 벌이는 곳이 많다. 그러나 ‘기부 서클’은 이것과는 개념이 약간 다르다. 본래 서구에서 출발한 기부 서클은 기부자들이 함께 모임을 만들고 돈을 모아 기부하는 것을 말한다. 서태지 마니아 기빙서클의 경우 자기들이 좋아하는 스타의 이름 아래 모여 기부 활동을 벌이되, 한번 돈 내고 마는 일회성 기부를 지양하고, 남들이 벌여놓은 일에 돈만 내고 마는 수동적 기부 또한 거부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서태지 팬이라면 기부도 남달라야 한다’는 생각에 오랜 기간 고민했다고 이들은 말한다. 그 결과 찾은 것이 청소년 지원이었다. 자신들이 청소년 시절 서태지라는 ‘멋진 사람’을 만나 희망을 품게 됐듯, 지금의 어린 친구들에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전하고 싶었다. 이를 매개해줄 단체로는 사회적 기업 지원 활동을 주로 해온 함께일하는재단을 골랐다. “단순히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설 수 있게 지원하는 단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라고 정씨는 말했다.
현재 서태지 마니아 기빙서클에 돈이나 재능 기부를 약속한 사람은 60여 명이다. 서태지 생일인 2월21일까지 그 수를 221명으로 늘리고 싶다는 게 이들의 바람이다. “서태지 마니아의 경우 이미 나이가 30~40대에 이르러 자기 영역에서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 이들이 청소년에게 지속적인 삶의 멘토가 될 수 있으면 한다”라고 정씨는 말했다.
서태지(왼쪽)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함께일하는재단’과 기부 협약을 체결했다(오른쪽).
■주민들이 직접 만든 문화 공간 ‘더불어숲’
지난 4월, 울산 동구 대송동에 50평 남짓한 작은 문화 공간이 하나 생겼다. 울산에서 30여 년간 노동·교육·정치 운동을 해온 노옥희 대표(51)와 지역 사람들이 뜻을 모아 세운 ‘더불어숲’이다. 언뜻 보면 책이 수백여 권 들어찬 도서관같고, 차를 마실 수 있어 북 카페 같기도 하다. 때에 따라서는 학부모들이 소모임을 여는 사랑방이자 강연회 장소로도 쓰인다.
대표적인 노동자 거주지인 울산 동구는 문화적으로 낙후한 편이었다. 이웃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싶어도 그럴 만한 공간이 부족했다. “세상을 바꾸려면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하고 그러려면 일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노 대표는 말했다. 결국 주민들이 나섰다. 한탄만 하지 말고 우리 힘으로 대안공간을 만들어보자며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 2년간 그렇게 모은 후원금으로 ‘더불어숲’이 탄생했다. 지금도 ‘더불어숲’은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된다. 회원 130여 명이 매달 1000원에서 1만원씩 내고 있다.
공간이 생기자 머리를 맞댈 일도 늘었다. 회원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인문학 교실, 천연화장품 만들기 강좌, 명사 초청 강연회 등이 그것이다. 매달 열리는 강연회에는 홍세화(언론인), 변영주(영화감독), 이범(교육 전문가) 등이 다녀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들은 오늘도 ‘더불어숲’을 지역 주민 모두의 열린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숲의 문턱을 어떻게 더 낮출지 고민 중이다.
시민들이 만든 문화공간 ‘더불어숲’에서는 매달 강연회가 열린다.
■숫돌에 칼 갈아주는 벼룩시장
은평구 벼룩시장에서는 무료 봉사도 펼쳐진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이면 서울 은평구 응암역 3번 출구 앞에 ‘나만 잘살면 무슨 소용인고’라는 현수막이 내걸린다. 진보신당 은평구당원협의회, 청구성심병원 노조, 서부비정규노동센터 등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회운동 단체가 마련한 벼룩시장 자리에서다. 벼룩시장은 올 7월부터 시작해 지난달까지 다섯 차례 열렸다. 책이며 옷가지 등 안 쓰는 생활용품을 내놓아 매번 40만~50만원씩 수익을 올렸다. 그동안 모두 198만원을 벌어들여 그중 114만원을 한솔학습지 노조와 KBS 계약직노조 등 다섯 군데 비정규직 노조에 전달했다. 참여 정도에 따라 수익금 중 10~50%를 비정규 노동자를 위해 쓰기로 약속했다.
벼룩시장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이들 운동단체가 나눔 행사를 펼치는 까닭은 지역 주민과 함께 공명하기 위해서다. 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싸움을 지원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에서 알리는 행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지역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이들이 처한 현실을 알리거나, 의료 민영화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펼친다. 지역 주민을 위한 행사도 다채롭다. 병원 노동자가 나서 지역민의 혈당과 혈압을 측정해준다. 헌 우산을 고쳐주거나, 숫돌에 칼을 갈아주는 이벤트도 인기가 좋다. 자전거 발전기로 믹서를 작동해 만든 과일주스는 지역 어린이들이 좋아라 한다. 비정규직 지원을 위한 기금도 조성하고, 단체 캠페인도 벌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이들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자발적 후원자도 생겨났다. 은평구 대조동에 있는 카페 ‘마을’의 관계자들이 수제 쿠키를 팔고,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큰옷 전문점 ‘빅투유’에서는 물품을 협찬한다. 지역의 청소년 문화운동 공간인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서는 행사 때마다 노래 공연을 펼친다.
겨울철을 맞아 오프라인 벼룩시장은 2월까지 잠시 쉬고, 온라인 벼룩시장만 운영한다. 참여를 원하는 이는 ‘cafe.daum.net/epbazaar’(은평, 우리 동네에서의 자립과 공존을 위한 벼룩시장)에 가입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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