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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은 ‘10년간의 축제’였다
바스티유 습격부터 축제로 시작해 축제로 끝나
집권-혁명세력간 이념 대결·국민통합의 장으로


축제의 정치사〉
윤선자 지음/한길사·1만7000원

2008년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으로 기록될 ‘촛불문화제’는 축제가 곧 정치 행위가 되고 정치가 축제 형식을 띠는 독특한 현상이다. 그러나 축제와 정치의 직접 결합이라 할 이 숭고하고도 열정적인 현상은 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유일한 현상은 아니다. 촛불문화제의 독특성은 반복성·연속성·점증성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양사학자 윤선자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가 쓴 <축제의 정치사>는 프랑스 대혁명기(1789~1799)에 나타난 축제와 정치의 결합 양상을 추적한 책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축제야말로 그 어떤 영역보다 정치적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였다”라고 말한다.

지은이가 프랑스 대혁명기를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은 “역사상 그 시기만큼 축제가 순수하게 정치에 봉사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시기 축제들은 대혁명기 정치문화의 실상을 포착하고 혁명적 이념이 퍼지는 과정을 밝힐 수 있는 열쇠 구실을 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축제는 기념과 기억을 통해 집단 정체성이 형성되는 비밀을 드러내주는 무대이기도 했다. 낡은 제도와 관습이 파괴되고 전적으로 새로운 제도가 확립되는 전대미문의 격변 속에서 당시 사람들은 혁명의 이념을 지키고 퍼뜨리고자 축제의 정치적 함의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이 시기 축제는 비공식적·우발적 축제와 공식적·제도적 축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발적 축제는 정치가 혁명적으로 폭발하는 지점에서 그 폭발과 함께 벌어졌으며, 공식적 축제는 그 정치적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고 사건을 제도화하는 방편으로 펼쳐졌다. 우발적 축제는 대혁명이 터지던 날 밤에 최초의 모습을 드러냈다. 1789년 7월14일 파리 민중들은 바스티유 감옥으로 행진했다. 무기가 그곳에 보관돼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파리 민중은 국왕 루이 16세가 외국군을 불러들여 ‘국민의회’를 위협하자 국민의 대표를 지켜야 한다며 무장을 결의했던 터였다. 바스티유를 함락하고 감옥 사령관 드 로네를 붙잡아 참수한 민중은 그날 밤 “팔레 루아얄 광장에서 바스티유 감옥까지 행진한 후 그곳에서 밤늦도록 춤을 추며 승리를 만끽했다.”
 
» 자유의 나무 아래에서 ‘공화국’을 상징하는 여성이 헌법을 들고 있다. 이 여성의 모습은 샤토비유 축제에서 ‘자유’를 상징했던 여성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민중의 우발적 축제는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벌어졌다. 두어 달 뒤 10월5일 파리 민중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해 들어가 왕을 끌어냈다. 루이 16세가 인권선언을 승인하지 않는 데 대한 정치적 불만과 빵이 없어 굶주리는 데 대한 경제적 불만이 겹쳐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의 행진은 그 자체로 즐거운 축제였다.” 국민방위대와 그들의 대표를 선두로 하여 왕의 가족과 밀가루 수레들이 뒤따랐다. 전리품인 밀가루 수레는 마늘창을 든 여인들이, 왕 가족이 탄 수레는 미국 독립전쟁 영웅 라파예트 장군이 호위했다. 수많은 여인들과 군중들이 그 행렬을 따라가며 외쳤다. “우리는 빵집 주인(왕)과 그 마누라와 자식들을 데리고 간다!” 프랑스 역사가 미슐레는 그 행렬에 여인과 어린이들이 많이 참여한 점에 주목해 이날이야말로 혁명 중에 벌어진 진정한 축제였다고 강조했다. 이런 자생적 축제는 혁명 기간 내내 예외적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되풀이됐다. 지은이는 우발적 축제를 이렇게 요약한다. “혁명의 날들 그 자체가 연극이고 축제였다. 민중들은 그 무대의 주인공이었고, 곧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이런 우발적 축제는 집단적 환희와 현실적 폭력이 공존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반면에, 혁명 이후의 공식적 축제는 폭력을 가능한 한 뒤로 밀쳐내고 환희를 극대화한 미리 기획된 정치적 무대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스티유 함락 한 돌을 기념해 1790년 7월14일 열린 ‘제1회 연맹제’였다. 이 축제는 프랑스 전체의 민중과 시민이 일체감을 느끼며 하나로 통합하는 상황을 연출한 거국적 행사였다. 그런 축제의 의미를 충족시키려면, 시민이 접근하기 쉬울뿐더러 확 트여 서로 일체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최적의 장소로 파리의 ‘샹 드 마르스’가 뽑혔다. “넓은 공간은 상호간에 개방된 시선을 가능하게 해서 인민 자신들이 스펙터클이 되고 참가자들이 서로 하나 되는 축제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라는 장 자크 루소의 말이 실천적 지표가 됐다.
 
» 샹 드 마르스 작업장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연맹제의 행사장 건설을 위한 토목 작업을 하고 있다.
 
제1회 연맹제의 더 큰 중요성은 ‘조국 대순례’에 있었다. 전국 각지의 국민방위대 대표자들이 파리 연맹제에 참가하려고 전국에서 수도로 행진하는 과정에서 ‘국민통합’의 정신이 드러났던 것이다. “마을을 지나는 국민방위대를 보기 위해 주민들은 공포를 떨쳐버리고 광장으로 뛰어나와 그들을 환영하고 해방의 기쁨을 공유했다. (…) 조국 대순례는 이런 감동적인 만남과 화해를 통해 프랑스를 하나의 지리적 단위로 결합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프랑스인들에게 통일된 국민감정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이런 국민통합은 아직 잠정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혁명은 미완이었고, 왕과 국민 사이를 꿰맨 실은 곧 끊어졌다. 첫 번째 혁명은 두 번째 혁명으로 나아갔다. 입헌군주제가 시민과 민중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자, 반군주제적 공화주의가 전면에 등장했다. 1792년 4월에 열린 샤토비유 축제는 프랑스의 모든 공화주의 세력의 연합 축제 성격을 띠었다. 이에 대항해 그해 6월 왕을 지지하는 입헌군주 세력은 시모노 축제를 벌였다. 두 축제는 세력 대 세력, 이념 대 이념의 대결이었다. 민중이 중심이 된 샤토비유 축제에 대해 당시 파리 시민은 “민중이 명령하고 준비하고 경축한 민중의 축제”라고 묘사했다.

샤토비유 축제와 시모노 축제는 둘 다 거대한 ‘자유의 마차’를 동원했는데, 그 ‘자유’의 의미가 서로 달랐다고 이 책은 말한다. 샤토비유 축제는 마차에 “프랑스인이여, 뭉치면 자유롭다”라고 썼는데, 시모노 축제는 “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진실로 자유롭다”고 썼다. 이미 있는 법을 존중할 것을 주장한 보수파 세력과 더 많은 자유를 주장한 진보파 세력이 맞서는 형국이다. 이후 혁명은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한 민중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왕정을 폐지한 뒤 최초로 공화정을 세우는 길로 나아간다. 프랑스 혁명의 전 과정에 걸쳐 축제는 축제로 이어졌다. ‘헌법의 축제’를 거쳐 ‘이성의 축제’로, 다시 ‘최고 존재의 축제’로 나아간 과정은 집권 세력과 혁명 세력의 끊임없는 긴장과 통합, 갈등과 분할의 과정이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 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서약〉. 1789년 6월20일 제3신분 대표들이 베르사유 궁전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 제정까지 국민의회를 해산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한길사 제공


축제준비도 축제였던 ‘손수레의 날들’

윤선자 교수는 <축제의 정치사>에서 프랑스 대혁명기 축제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로 ‘손수레의 날들’을 꼽는다. 파리 민중이 한마음으로 단결해 불가능한 과제를 자발적으로 완수한 것이 이 사건이었다.

1790년 제1회 연맹제를 한 달 앞두고 샹 드 마르스를 축제의 광장으로 만드는 토목 공사가 벌어졌다. 축제 광장에 이르는 센 강변 길을 닦고 광장에 제단을 만드는 일이었다. 먼저 이 공사에 투입된 사람들은 ‘실업자 자선 단체’ 소속 노동자들이었다. 처음 3000명이었던 노동자 수는 나중에 1만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혁명에 대한 열정과 헌신만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낮은 임금에 대해 끝없이 불평했다. 게다가 제단과 연단을 만드는 일은 숙련된 노동이 필요했다. 대목장이·소목장이·장식화가 들이 대거 동원됐다. 이들이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일어나 여러 사람이 죽고 다쳤다. 불만이 폭력이 돼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파리 시당국은 국민방위대를 시켜 작업장을 감시하게 했다. 공사는 더디고 불평은 늘고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침체되고 불안한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 파리 시민들의 자원봉사였다. 이 자원봉사를 이끌어낸 사람은 삼위일체부대 소속의 한 군인이었다. 그는 샹 드 마르스 작업에 도무지 진척이 없다는 말을 듣고 부대별로 군인 10명씩을 뽑아 샹 드 마르스에 보내자는 제안을 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4200명의 군인이 매일 저녁 6시까지 헌신적으로 공사에 참여했다. 그들의 참여에 고무된 파리 시민들은 각자 손수레를 끌고 샹 드 마르스로 몰려들었다. “시민의 수가 점점 증가하더니 7월8일에는 25만~30만명으로 늘어났다.” 공사 자체가 흥겨운 축제가 됐다. 그때의 분위기를 혁명신문 <파리의 혁명>은 이렇게 전했다. “파리 시민들은 아침 일찍 각자 도구를 메고 수레에 흙을 싣고 행렬을 지어 샹 드 마르스로 들어온다. 그 수레는 마치 축젯날처럼 나뭇가지로 장식돼 있다.”

행사를 앞두고 지지부진하던 작업이 순식간에 완료됐다. “그것은 혁명을 향한 시민들의 열정과 사랑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손수레의 날들’은 강제되지 않은 노동, 지치지 않는 운동, 질서와 조화의 축젯날이었다. 시민들은 작업을 하러 갈 때와 끝나고 귀가할 때 행렬을 지어 움직였다. 북을 치는 사람을 선두로 해서 수레와 짐마차·삯마차·시민들이 뒤따르는 즐거운 행렬이었다.” 그리하여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손수레의 날들’은 그 참여의 결과인 연맹제 자체보다 더 큰 역사적 의미를 품게 됐다고 이 책은 말한다.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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